"사람은 누구나 생존과 행복을 동시에 추구할 권리가 있죠."
2019.07.24
우리 다시 어린 시절처럼 창작해봐요.


"너는 그림을 그릴 능력이 없어"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그때는 반드시 그림을 그려라.
그러면 그 목소리는 잠잠해질 것이다.

- 빈센트 반고흐


하루 하루를 그냥 흘려 보내기만 하다 보면 어느 날은 마치 소화를 하지 않고 밥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낀 것을 어떤 결과물로 내놓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직장에 다니고, 한 사람의 어른의 몫을 수행하다보면 창작과는 멀어지고, 급기야는 '내가 무슨 창작이야'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타이포그래피 전문가이자 트레바리 클럽장이신 유지원 님이 이끄는 [튜링의 아틀리에]에서라면 '잘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다시 어린 아이때처럼 부수고, 다시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실수를 할 때도 있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결국, '우리'가 함께 창작하는 경험을 하고 나면 어른이 되고 나서도 이만큼 자랄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지원 님의 인터뷰, 지금 만나러 가보실까요? (글/ 사진 최성운 님)



1. 만들고 부숴 봐요, 어린 날처럼



먼저, 트레바리 클럽장으로 참여하시게 된 과정이 궁금해요.


경향신문에서 ‘뉴턴의 아틀리에’ 칼럼을 함께 연재하는 김상욱 교수님이 클럽장으로 활동하고 계세요. 그분에게 들어서 트레바리를 알고 있었고, 윤수영 대표님의 제안을 받아서 올해 1월부터 시작하게 됐어요.


독특하게도 [튜링의 아틀리에]는 독서모임과 별도로 창작 워크숍도 진행한다면서요.


네. 한 시즌이 4개월이니까 1년이 세 시즌으로 나뉘잖아요.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즌에는 각각 공동창작과 개인창작 워크숍을 하고, 세 번째 시즌은 제 방학이에요. (웃음) 클럽을 가능한 오래 지속하고 싶은 만큼 방학이 꼭 있어야 해요.


이 포맷은 지원님께서 먼저 제안하신 건가요?


네. 제가 책을 무척 많이 읽는 편인데 제 정체성은 결국 창작자거든요. 독서는 그 자체로도 즐거운 일이지만, 책에서 익힌 걸 창작으로 연결시키지 않으면 허무하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또, 저는 디자인의 사회적 가치 확산에도 관심을 두고 있거든요. 디자인은 디자이너들의 전유물이 아니잖아요. 대중과 민감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디자인 분야 바깥의 분들과 만나서 함께 창작할 수 있는 기회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같았어요. 대표님께 여쭤봤더니 너무 좋다고, 다만 제가 너무 힘들지 않도록 살살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웃음)


디자인의 사회적 가치 확산이라는 말씀이 인상적인데, 조금 풀어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는 어렸을 때 뭔가를 만들고 부수다가 어머니에게 혼났던 기억이 있잖아요. 내 몸을 통해서 세계가 바뀌는 걸 보면서 즐거워하다가도, 자라면서 점점 창작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돼요.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던 표현 욕구를 꺼내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다음으로는, 좋은 디자인을 알아보는 감식안과 감상의 즐거움이 우리 사회에도 널리 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공부했던 독일에서는 디자인이 사회 전반에서 형광등처럼 반짝이고 있었는데, 사실 디자인이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수용자들의 감수성이 높아야 하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들 마음속의 자부심이나 즐거움을 꺼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마침 트레바리가 적합한 플랫폼이었던 거예요.




2. 미술과 과학은 원래 친합니다.



클럽명이 [튜링*의 아틀리에]인데, 미술에 과학을 접목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셨어요?


* 앨런 튜링 : 현대 컴퓨터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영국의 수학자


저는 미술을 전공했는데, 그러면 수학과 과학이 싫어서 도망간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요. 너무 이상한 생각이잖아요. 저는 둘 다 좋아했거든요. 미술과 과학은 길항적인 관계가 아니에요. 제 디자인 영감의 원천도 대부분 수학이나 과학의 원리에서 와요. 보면 아름다워서 가슴이 뛰고, 작품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는 해요.


방금 제가 드린 질문에도 미술과 과학은 원래 친하지 않다는 선입견이 들어가 있네요.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는 생각이니까요. 수학과 과학과 미술을 함께 배울 기회가 제도권 교육 아래에서는 거의 주어지지 않기도 하고요. 그런 측면에서 트레바리는 중요한 대안교육의 일부라고도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면 모임에서 읽을 책은 어떻게 선정하시나요?


첫 시즌을 예시로 말씀드리면, 과학서적 - 디자인서적 - SF소설의 순서대로 읽었어요. 마지막 달에는 요리스 라르만이라는, 과학적 원리를 조형예술의 형태로 구현해내는 작가의 영문 작품 해설을 읽었고요.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구성이죠. (웃음)


멤버 분들의 구성이 다양할 텐데, 모임에서는 어떤 대화가 오가나요?


저희 클럽에는 디자인 전공자가 많은 편이고 이공계와 인문사회계열 전공자 분들이 비슷한 비율로 계세요. 말씀드렸듯이 저는 매번 창작을 염두에 두고 책을 고르는데, 디자인 비전공자 분들에게 무턱대고 창작을 하라고 하면 어려워하실 거잖아요. [튜링의 아틀리에]에서 독서란 생각의 저변을 넓게 만들어서 미처 가보지 못한 지점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에요. 각자 자신이 속하지 않은 분야의 책을 읽고, 서로 말을 섞어보면서 익숙해지는 데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SF 소설을 읽는 건 창작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저희가 읽었던 책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인데, 작가가 과학을 통해서 소설을 창작해나간 작법을 살펴보려고 했어요. 테드 창은 0부터 1까지 세계가 발전해온 양상을 살핀 다음 1.5를 상상해내는 식의 외삽법을 주로 사용하거든요. 작가의 건축적이고 구조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영감을 얻자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3. 사랑스러운 집단지성의 힘


사진 copyrightⓒ 류승완 님

 

이제 창작 워크숍에 대한 이야기를 여쭈고 싶은데, 멤버 분들은 모두 창작에 대한 열의가 있으셨나요?


그럼요. 제가 모집 페이지에 재료비가 10만원 정도 들 수 있다고 적었는데, 다들 한 달에 10만원으로 생각해서 총 40만원이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20명이 40만원씩이면 800만원인데, 그 돈으로는 집도 짓겠다. (웃음) 사람을 신나게 만들어주시더라고요.


최종적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지는 지원님이 결정하신 건가요?


이번 시즌의 경우에는 개인별로 도장을 만든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둔 다음 의견을 여쭤봤어요. 지난 시즌은 공동창작인 만큼 방식이 달랐는데, 먼저 첫 모임을 마친 뒤에 각자 해보고 싶은 주제에 대한 설문을 받았어요. 그때 고등학교 수학교사이신 윤원준 멤버님이 ‘구체 분할’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주셨고요. 흥미롭기도 했고, 가장 튼튼한 아이디어라서 골랐어요.


사진으로 보면 아름다운데, ‘구체 분할’이라는 단어를 듣고 아리송하셨던 분들도 계셨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전혀 관심 없는 분들도 계셔서 설득을 해야 했어요. 다들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잘해보려고 오신 분들인 만큼 모두의 의견을 고려해야 했으니까요. 두 번째 모임에서 ‘구(球)체적인 다차원’이라는 워크숍 제목을 지었어요. 모임이 네 번이니까 시간이 빠듯해요. 워크숍 날짜는 시즌이 끝난 다음인 5월 11일로 정했는데, 놀랍게도 사정이 생긴 두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참석해주셨어요.


현장에서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없었나요?


제가 설계도를 잘못 짰어요. (웃음) 오전에 종이로 연습을 했을 때는 잘 휘어지니까 티가 안 났는데, 막상 오후에 주문해둔 재료로 만드는 과정에서 삐그덕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오히려 재밌는 게임이 됐어요. 스무 명 모두가 반드시 완성해야 한다는 의욕으로 불타올라서, 집단지성에 대한 사랑스러움과 정서적 유대감을 크게 느꼈어요. 사진 정말 예쁘지 않아요?


진심으로 멋지다고 생각해요. (웃음)


디자인과 예술 전공자분들은 창작에 거침이 없고 사진 까지 멋지게 나올 온갖 아이디어를 모아주셨고, 인문사회 전공자분들은 기획과 집행과 회계를 맡아주셨고, 이공계 전공자분들은 연역적 추론이 빨라 척척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해내셨어요.


지원님께도 무척 즐거운 경험으로 남아있다는 인상이에요.


만약 제가 성장하고 얻는 게 없었다면 트레바리를 안 했을 거예요. 저 역시도 멤버 중의 한 명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했고, 재료비도 같이 냈어요. 다른 곳에서 할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었으니까요. 워크숍이 끝났을 때는 술도 안 마신 상태로 모두가 성취감에 취해 있는 분위기였는데, 클럽장의 입장에서 그보다 강력한 피드백이 없었어요.



4. 글자도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지원님께서는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신데, 소개글에 “책과 문화와 인간과 우주를 모두 사랑해서 타이포그래피를 합니다”고 적혀 있더라고요. 우주와 인간과 글자는 어떤 관련이 있나요?


타이포그래피는, 요약하자면 ‘부재하는 것들과 연결되고 싶어 하는 인간 마음의 총체’라고 할 수 있어요. 글자는 눈으로 하는 소통이잖아요. ‘긁다-’를 어원으로 해요. 흔적을 남김으로써 내가 없는 자리에서도 다른 사람과 내가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죠.


같은 시선을 적용하면, 저는 자연에서 어떤 흔적을 볼 때도 그 뒤의 원리와 과정을 생각하게 돼요. 나무의 나이테도 일종의 흔적이고 사람들은 거기서 의미를 도출해내잖아요. 저에게는 타이포그래피와 다를 바 없게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사람과 사회와 자연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어느 순간 타이포그래퍼가 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술하신 <글자 풍경>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이 책은 어떤 이유에서 쓰신 거예요?


한마디로 말하면, 이 책 역시도 타이포그래피의 사회적 가치 확산을 위해서 쓴 책이에요. 전공자가 아닌 분들도 글자에 흥미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교양서처럼 썼어요.


책을 쓰는 과정에서 특히 신경 쓰셨던 부분이 있나요?


우선 가치 확산에 가장 크게 기여하신 분은 추천사를 써주신 박찬욱 감독님이시고요. (웃음) 책에서는 과학이나 인문사회학이 어떻게 글자의 원리와 관련되는지, 연결성을 강조하는 데 중점을 뒀어요. 이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저 스스로가 외부와의 접점이 많아야 했고요. 예를 들어 제가 물리학과에 가서 글자에 대한 강연을 하면, 그분들의 질문은 디자인과에서 받는 질문과 굉장히 달라요.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요. 마치 외국어를 익히듯 다른 분야의 질문법에 익숙해지고, 그분들이 이해하시기 쉽게끔 설명하는 훈련이 많이 필요했어요.


타이포그래피의 가치 확산으로부터 기대하시는 사회적 변화가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생존과 행복을 동시에 추구할 권리가 있잖아요. 간혹 생존이 더 중요한 사람에게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없는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있는데, 이 사례를 커뮤니케이션의 경우로 가져오면 정보와 정서의 관계가 될 거예요. 정보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것도 타이포그래피의 역할이지만, 사람들이 좋은 기분으로 읽도록 해서 자존감을 높여주는 일도 마찬가지로 중요해요.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까지도 경제적 가치가 무언가의 효용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잖아요. 그 논리 속에서는 예술이 잉여적인 것으로 취급받기 쉬운데, 예술을 통해서 인간의 정서와 행복감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인식이 늘어나면 좋겠어요.  



5. 여가로서의 트레바리



마지막 질문인데요, (클럽장으로서의) 방학은 어떻게 보내실 계획이세요?


내년 시즌에 할 일들을 시뮬레이션 해두고, 워크숍에 대한 고민도 미리 해야겠죠. 책 여덟 권도 골라야 하고, 할 일이 많네요.


[튜링의 아틀리에]를 가능한 오래 지속하시는 게 지금의 목표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사실 저는 목표보다는 동기가 더 중요한 사람이에요. 트레바리 클럽장도 직업보다는 여가에 더 가깝게 느끼고 있고, 다른 곳에서 할 수 없는 경험을 하면서 저 스스로 즐기는 기회로 삼고 있거든요. 이벤트에도 자주 참여하고 있어요. 요리도 해봤고 위스키 시음회도 갔는데, 이처럼 즐거움을 주는 기회들이 공기처럼 떠다니고 있어서 언제든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트레바리가 주는 중요한 가치 같아요. 부디 이벤트의 수준이 낮아져서 마음 편하게 한 달에 두 개만 고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너무 많은 돈을 바치고 있어서. (웃음)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네요. (웃음)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기처럼 떠다니는 즐거움을 만나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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