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영업 당해' 본 적 있으신가요? 시를 읽는 클럽 [시밤]에서는 그런 순간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어렵고 아리송하기만 한 것 같은 시를 읽고 쓰는 마음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2년 동안이나 [시밤]을 이끄시다 잠시 재충전을 위해 떠나시는 김상혁 클럽장 님과의 인터뷰를 준비했어요. (인터뷰 / 사진 최성운 님)
먼저, 트레바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으시게 되었나요?
민음사 문학팀장으로 있는 서효인 시인이 [트레바리X릿터] 클럽을 운영한 적이 있었을 거예요. 저와 친한데, [시밤]이라는 클럽에서 사람을 필요로 한다고 전해주더라고요. 이번 시즌까지 꼬박 2년을 채웠네요.
사람들이 함께 시를 읽는 풍경이 쉽게 그려지지는 않는데, 보통 모임은 어떻게 진행이 되나요?
우선 한 달에 시집 2권을 선정해서 읽어요. 멤버 분들이 각자 좋았던 시를 돌아가면서 이야기하면 그중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제가 말을 조금 보태드려요. 아주 어려운 부분에 대한 설명이나, 특정 시의 문학사적 맥락을 짚어드리는 정도로 이야기를 하는 식이에요.
시라는 건 다른 문학 장르보다도 감상이 훨씬 자유로운 예술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오히려 막막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줄거리를 따라서 읽을 수가 없죠.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것처럼, 1연과 2연의 메시지를 찾고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를 찾는 방식으로는 현대시는 전혀 읽히지가 않아요. 저는 만약 한 문장이라도 내 마음과 조응하는 게 있다면 그것도 좋은 독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혹은 마음에 드는 단어를 찾아보겠다, 분위기를 읽어보겠다는 식으로 읽을 수도 있고요. 우선은 좋아하는 시인 한 명을 골라보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그건 곧 자신에게 맞는 감수성 하나, 태도 하나를 고른다는 것이거든요.
시에 대한 감상 자체는 개인의 것일 텐데, ‘함께’ 읽는 일에는 어떤 의미가 더 있는 걸까요?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 자체가 의미 있어요. 신기하게도,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행위는 말하고 있는 나까지 청중에 포함시키는 힘이 있어요. 자기 말을 자기가 듣고, 그 말에 대해 생각하고, 돌아보죠. 그러면 거짓말도 줄고, 잡다한 감정도 정리가 돼요. 반면 나 혼자 하는 독서는 나를 속이기도 해요. 시 읽기는 다른 독서에 비해 감정이 더 많이 소모되니까, 스스로 속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고요. 자신의 감상을 자기로부터 떨어뜨려 바라보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함께 읽는 과정을 거치면 좋았던 시가 못나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못났다고 생각한 작품에서 대단한 매혹을 느끼기도 하거든요. 후자의 경우를 [시밤]에서는 흔히 영업당했다고 말해요. 함께 읽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신기하고 즐거운 순간이죠.
[시밤] 소개글에 가끔씩 모임에서 창작을 한다고도 적혀 있던데, 실제로 창작 수업을 진행하셨던 적도 있나요?
시간이 너무 부족하더라고요. 간혹 자신이 쓴 시를 보여줘도 되냐고 묻는 분이 계셔서 개인적으로 받고는 있어요. 멤버 한 분은, 제가 정말 말렸는데, 계속 시를 쓰기로 결심하고 공부하고 계세요. 고생길이 열린 거죠.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요. (웃음)
그렇게 한번 시작을 하면 다시 돌아가기 어려운 거겠죠?
네. 돌아가신 김현 선생님께서 시에 대해 하신 말씀을 좋아하는데, ‘시는 쓸모없기 때문에 쓸모 있다’고 하셨어요. 쓸모없기 때문에, 밥도 안 되고 커피도 안 되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자유가 매력적인 것 같아요. 돈도 안 되는 시를 써보겠다고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자기 삶을 낭비하고 있는지만 봐도 알 수 있죠.
시를 읽는 사람에게도 시를 읽어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테고요. [시밤] 멤버 분들을 포함해서요.
시를 읽는 체험은 내가 하지 못했던 생각, 내가 설명하지 못했던 감정을 마주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시인이란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새로운 생각을 많이 하고, 낯선 곳에 시선을 두려고 하고, 그런 일에 시간 낭비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요. 시집을 읽는 분들도 마찬가지겠죠. 낯선 사고와 감정을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결국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경험을 하셨을 거라고 짐작해요.
그럼 상혁님은 언제 처음으로 시에 매혹되셨나요? 좋아하는 시의 특성이 있으신지도 궁금해요.
안 믿으실 수도 있지만, 고등학생 때 이육사의 시를 보고 놀랐어요. 교과서의 시는 대개 재미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고 말할 때 뭔가 숭고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이게 어떤 멋진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좋아하는 특성이라면, 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시를 좋아해요. 시가 영화나 드라마보다 묘사를 더 잘할 수는 없을 거잖아요. 반면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이건 영상으로 표현하기도 어렵고, 오직 문장으로만 만들 수 있는 무언가인 거죠.
[시밤]에서도 상혁님이 좋아하시는 시인들을 주로 소개하시나요?
모임에서는 최근에 화제가 되었던 시집을 먼저 골라요. 두 번째로, 대중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문단에서 많이 회자되는 시를 소개해드리는 편이고요. 가끔 사심이 들어가기도 해요. 제가 박상순 시인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분이 난해한 시를 쓰기로 소문난 분이거든요. (웃음)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시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실마리를 얻은 적도 있어요.
[시밤]에서는 주로 현대시를 읽는다고 들었어요. 혹시 ‘현대시는 어렵다’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작가와 독자 사이의 괴리가 분명히 있어요. 현대시가 어렵고 시인들끼리만 아는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현대미술이나 클래식의 경우에도 처음부터 너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잘 없거든요. 예술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사전 준비도 필요해요. 다만 시는 국어로 쓰다 보니까, 바로 의미가 파악되지 않으면 말장난 같다고 느끼실 수는 있겠죠.
예를 들자면, 현대시는 더 이상 시골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을 말하지 않아요. 모든 예술은 결국 현실의 반영이니까. 김소월이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당시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시대를 약간 앞섰기 때문이지, 지금 누가 그걸 똑같이 쓰면 등단할 수 없겠죠. 시인들이 억지로 어렵게 쓰는 게 아니라, 우리의 생활이 달라지고 복잡해졌으니까 자연스럽게 시도 어려워졌다는 이해를 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이건 제가 클럽 시작 전에 미리 드리는 말이기도 해요.
분명 국어는 평소에 잘 알고 사용하는 언어인만큼, 이해가 안 되면 더 부정적으로 대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이해가 잘 안 된다고 해서 ‘내가 실패했다’ 혹은 ‘이 시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시밤]의 경우에도, 첫 번째 시간에는 어렵게 느끼시던 분들도 두세 번째에는 처음보다 훨씬 잘 읽으세요. 반대로 생각해보면, 국어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빨리 익숙해질 수 있거든요.
직업 작가로서, 독자들이 상혁님의 의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까봐 걱정되셨던 적은 없나요?
작품이 출판되면 그때부터는 작가의 손을 떠났기 때문에 어떤 해석도 무관하다고 생각해요. 간혹 독자를 믿지 못하거나 평론가를 싫어하는 시인도 있어요. 자신의 시를 마음대로 재단한다고 해서요. 그런데 평론가는 최고급 독자거든요. 그들에게도 읽히지 않는 부분을 가지고 내 의도를 읽지 못했다고 말하는 건 프로답지 않은 태도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의미가 없는 일이에요. 자기가 항상 의도를 설명하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요. 재밌는 건, [시밤]에서 시를 처음 읽으시는 분들도 대체로 비슷한 감상을 얘기하신다는 거예요.
2년 동안 트레바리에서 함께 시를 읽는 시간이 상혁님에게는 어떤 의미였나요?
저는 트레바리 오는 길을 항상 좋아했어요. 거짓말 같지만 정말 그래요. 전혀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고 놀라운 경험이에요. 제가 다른 어느 자리에서, 의사, 경찰, 기자, 운동선수가 말하는 시 감상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런 곳은 여기가 유일했어요. 다만 최근에는 지난 시즌과 비슷한 말을 하고, 비슷한 예를 드는 스스로에게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저도 계속 공부가 필요해요. 다른, 더 정확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요. 저는 이번 시즌을 마치고 잠시 쉬어가지만, 누군가가 꼭 이걸 더 잘해주면 좋겠어요. 훨씬 더 화려하게, 훨씬 더 왁자지껄하게요.
직업 시인으로서의 이야기도 좀 더 듣고 싶은데요, 최근 출간된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까지 총 세 권의 시집을 내셨어요. 그전에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가 있었고, 그리고 데뷔작인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
네, 그 책은 제가 별로 안 좋아하는 책이에요.
시간이 흘러서 그런 걸까요?
어쨌든 한 권의 시집을 쓰고 나면 그 세계에서 빠져나와서 다른 세계로 나아가려고 자꾸 노력하거든요. 자기반복을 안 하기 위해서. 그러면 예전의 세계가 초라하고 허름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인들은 자신의 최근 시집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요. 첫 시집은 2010년 전후에 썼던 시들을 모은 건데, 벌써 시대가 많이 바뀌었으니 촌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렇군요. 저에게 흥미로웠던 부분은 슬픔이라는 단어가 세 번 중 두 번이나 사용된 것인데요, 상혁님에게 슬픔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이번 시집의 제목을 두고 얘기하자면, ‘슬픔 비슷한 게 눈물이 되면 안 된다’는 건 우리가 정확하게 슬픔이라고 알고 있는 것만이 눈물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슬프다고 말하는 여러 상황이 있잖아요. 드라마를 봐도 슬프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이 슬퍼하는 걸 보고 따라서 슬퍼하기도 하는데, 그건 사실은 학습된 것이거든요. 눈물을 흘리는 건 타인의 고통에 진실되게 공감할 때여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사실 한국 시 중에 기쁜 시가 별로 없어요. 복권에 당첨되어도 슬프고 밥을 배불리 먹어도 슬프고. 뭐든지 슬프고 서글프고. (웃음) 그런데 ‘어쩐지 슬픈’ 게 아니라, ‘정확히 슬픈’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싶었어요. 바꿔 말하면 타인에 대해서 얼마나 슬퍼할 수 있는가, 얼마나 책임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지금은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시는 중인가요?
네, 그런데 이번 책은 사실 3집이라기보다는 2.5집에 가까운 느낌이에요. 그만큼 짧기도 하고요. 지금까지는 두 번째 책의 연장선 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곧 다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죠.
다시 읽기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아까 ‘시는 쓸모없어서 쓸모 있다’는 김현 평론가의 말씀을 인용하셨어요. 이 말은 시를 읽는 행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걸까요?
시가 하찮거든요. 진짜 하찮은 것 같아요. 가령, 저도 제 아이를 볼 때면 이렇게 아름다운 대상이 있는데 시를 써야 할까 싶거든요. 다만 제가 갖고 싶은 예술가의 덕목이 있다면, 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존재지만 사실 내가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잘 하지 않죠. 하지만 예술가는 자꾸 존재를 돌아보기 때문에, 매 순간 죽음 앞에 선 사람인 거예요. 죽음은 모든 걸 공평하게 만들잖아요. 그때는 오히려 돈보다 시가 더 중요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거죠. 저는 항상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이렇게나 쓸모없는 시를 읽는 작업 자체가 훨씬 더 쓸모 있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말씀을 듣고 나니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제목의 책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그럼 이제 오늘 가져오신 책을 소개해주시겠어요?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이라는 책이에요. 제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을 고르면 아마 시집일 텐데, 시인이 시집 가져오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이 없거든요. (웃음) 황현산 선생님께서 작년에 작고하시기 전에 낸 에세이집이에요. 보통 어떤 책을 안 읽을 때 아껴 읽는다는 핑계를 대는데, 사실 좋은 책은 정신없이 읽잖아요. 그런데 이 책은 정말 아껴 읽고 있어요. 못 읽겠어요. 다 읽고 나면 이분이 정말 떠나신 게 느껴질 것 같아서.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책을 만지면서 물성을 느껴보는 일 자체가 영감을 주고, 또 이 책은 현실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해요. 제가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어서, 읽으면서 배우고 있는 것 같아요.
오늘 여러 선생님들을 언급해주셨는데,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가지고 계신가요?
지금으로서는 일부러 생각하고 있진 않아요. 그런 목표를 정해두는 일 자체가 소용없다는 걸 너무 많이 배워왔어요. 고등학생 때 ‘서른에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지’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하나도 된 게 없거든요. 아무도 제가 시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요. 친척들은 지금도 의아해해요. (웃음)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던 결심이 한번 무너졌던 순간은 제 아이를 만났을 때였어요. 그러고 보면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계속 바뀌는 것 같아요. 아내를 만났을 때, 강아지를 처음 키웠을 때, 아이가 태어나고 또 많이 달라졌고. 매번 어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반응이 달라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야만 가르치지 않는 사람이 될 것 같고, 괜히 아는 척 하지 않는 사람이 될 것 같아요. 계속해서 변화를 수용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무사히 변하면서, 꾸준히 써 나가시길 응원하겠습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변화를 수용하는 사람으로 남기 위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