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늘 실망하지만, 그래도 결국 희망은 사람밖에 없다고 자주 생각합니다."
2019.07.17
그림자를 따라가면 어떻게 되나요?


그래서 그림자를 따라가는 기분이 어땠나.

나쁘지 않았어요.

자꾸 따라가게 되던데요,

라고 말하자

그렇지,라는 듯

여씨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서운 거지.

그림자가 당기는 대로 맥없이 따라가다 보면

왠지 홀가분하고 맹하니 좋거든.

좋아서 자꾸 따라가다가 당하는 거야.

사람이 자꾸 맥을 놓고 있다보면 맹추가 되니까.

가장 맹추일 때를 노려 덮치는 거야.


- 황정은, <백의 그림자> pp.31~32




<백의 그림자>는 황정은의 소설입니다. 소설의 인물들은 가난하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가족을 잃는 일이 생겨도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생채기 난 삶들은 절뚝절뚝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날 그림자가 일어서곤 합니다. 과연 그림자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많은 해석을 내놓았지만 여전히 아리송합니다. 중력을 수식으로 쓰지 못해도 중력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알듯, 그림자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워도 우리 모두는 그림자가 어떤 느낌으로 찾아오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림자가 일어서는 순간들이 있으니까요. 살아가면서 그림자가 일어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문-보라]에서 나눈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당신도 그림자가 일어선 적이 있었나요?



첫번째 이야기 : 서류 100번 탈락보다 힘들었던 것은


그림자 하나

- 이XX 님의 독후감 전문


그림자가 일어선 경험이 있는가? 내 경우, 대학 졸업 후 취업이 안되던 시기에 그림자를 보았다. 당시 취업 원서를 낼 때마다 '거절당하기 연습'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서류에서 번번이 탈락하기만 100번째, 15년 하반기 모든 공채에서 떨어지고 내 손으로 졸업을 미뤘다. 1월의 시작과 동시에 백수가 되어 매일 집 근처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주말도 없이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가끔은 어머니의 걱정 어린 취업 얘기도 들었다. 먼저 취업한 친구들은 카톡으로 회사가 힘들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스트레스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괜찮았다.


견디기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다. 도서관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다. 같이 취업 준비하던 친구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취업했다. 분명히 나는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니 뒤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기분이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그림자를 보았다. 그림자에서 나의 외로움을 보았다. 그토록 외로운 적은 처음이기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처음 그림자를 보았던 은교와 그녀를 잡는 무재가 좋아 보인다. 숲에서 무재를 따라가던 은교와 나루터로 무재재를 이끄는 은교. 그림자가 일어서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던 은교도, 그림자를 조심하던 무재도 더 이상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둘이 함께 있기에. 그래서, 나도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나 보다.



두번째 이야기 : 그땐 좀 어렸고, 슬펐고, 여렸어


누구에게나 그림자가 일어서는 순간이 있다

- 임XX 님의 독후감


누구에게나 그림자가 일어서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게 어떤 이유이건 간에, 인생에서 한두번은 그런 순간을 맞닥뜨리지 않을까. 그런데 가난이 가까우면, 더 쉽게 그런 순간을 만나게 되는 것 같다. 내 그림자가 일어선 것이었을까, 아니면 아빠의 그림자가 일어선 것이었을까. 어쨌든 내가 그림자를 목도한 순간은 가난이 우리집을 어슬렁거렸던 때였다. 내가 고3 때 아빠가 실업을 하게 되면서 우리집은 가난과 조금 가까워졌다. 이전에는 그저 평범한 집, 그리고 검소한 집이었는데 아빠가 회사를 4-5년쯤 안 다니게 되면서는 평범하지가 않아졌다. 내가 과외해서 버는 돈보다 적은 돈을 벌려고 하루 종일 일하는 엄마, 하루 종일 집에서 주식을 하는 아빠, 주식 상황에 따라서 롤러코스터처럼 위아래로 흔들거리는 집 안의 분위기, 차상위계층이라는 눈앞의 현실. 가난이 우리집을 불화로 이끈 것은 아니었으나, 부모님의 축 처진 어깨가, 초라한 뒷모습이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부모님 이야기만 하면 자꾸만 목이 메고 눈물이 흘렀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가난을 이용하기도 했다. 복지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상황을 더 과장하여 자기소개서를 쓰기도 했고, 또 다른 지원을 받기 위해서 힘든 상황에서도 내가 얼마나 잘해나가고 있는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만큼의 상황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학자금 대출을 받지 않았고, 집에 빨간 딱지가 붙어있었던 것도 아니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서야 그때의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가난이라는 내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진짜 나를, 진짜 내 인생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땐 좀 어렸고, 슬펐고, 여렸어. <백의 그림자> 책은 그래서 좋았다.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를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그려내지 않았고, 폭력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담담하게 이야기했고, 그래서 더 마음에 와닿았다. 더 마음이 갔다. 또다시 내게 그림자가 일어서는 순간이 다가올 수 있겠지. 그때에는 좀 더 담담하게 지나 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서로의 독후감을 읽고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독후감들을 읽는 동안 클럽 [문]의 이런 소개글을 떠올렸습니다. 문학을 타인과 함께 읽는다는 것, 얼마나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일인지요. 문학을 함께 읽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이처럼 자신의 가장 내밀하고, 그래서 때로는 심연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동시에 매력적인 이유는, '나'라는 존재에서 그런 심연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기 떄문이겠지요. 그러니까 문학을 함께 읽는다는 것은 밝은 것이든, 어두운 것이든 모두 자기 자신으로 껴안는 작업을 서로 지켜봐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요? 그리고 무슨 말을 건네야 할까요? 문학을 함께 읽는 사람들, 그러니까 이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일을 함께 하는 멤버들은 이렇게 서로에게 응답했습니다.



"저도 사는 게 공허하지 않나 하고 자주 생각합니다. 그런데 뭐 어쩌겠나 싶기도 하고. 사람에게 늘 실망하지만, 그래도 결국 희망은 사람 밖에 없는. 한 명 한 명이 모두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면 좋겠네요."


예전부터 클럽 [문-보라]의 뒤풀이가 오래도록 이어진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었습니다. 오늘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아요.

서로가 서로에게 그 한 사람이 되어 주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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