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균 클럽장이 말하는 트레바리
2022.10.07

이상균 클럽장은 넥슨에서 마비노기 영웅전을 만드는 데 참여하고, 크래프톤을 거쳐 현재 스마일게이트의 게임 개발실을 이끌고 있는 게임 프로듀서입니다. 또한 PC통신에서 『하얀 로냐프강』을 연재하며 이름을 알린 1세대 판타지 소설 작가이고요. 지난 6월부터 트레바리에서 인생에 보탬은 안 되는 책만 읽는 클럽 [인생에 보탬은 안 되지만]을 진행하셨는데요. 그런데 이 클럽이 읽은 책을 살펴보면 양자역학, 뇌과학, 심리철학 등 쉽사리 집어 들기 어려운 책들이에요. 이상균 님을 만나 왜 이런 책이 인생에 보탬이 안 되는지, 그리고 왜 그걸 함께 읽었는지 들어봤습니다.



왜 인생에 보탬이 안 되는 책인가요


Q. 클럽 이름이 인상적입니다. 트레바리에 독서모임을 하러 오시는 분들은 자기계발이나 네트워킹에 대한 의욕을 갖고 계시는데, 역설적으로 ‘인생에 보탬이 안 되는 것’을 강조하셨어요.

이상균: 저는 자기계발서를 안 읽거든요. 저는 시간이 돈보다 훨씬 귀한 자원이라고 생각해요. 시간을 다 쓰면 죽으니까요. 그런데 자기계발서를 읽는 건 나를 계발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그러니까 결국 시간을 쓰고 돈을 버는 거잖아요. 저한테는 손해 보는 행위죠. 그래서 안 읽어요. 그러다 보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인생에 보탬이 되는 책을 다 안 읽는 거예요. 인생에 보탬이 안 되는 책을 주로 읽기 때문에 독서할 때 늘 외롭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트레바리에서 섭외 왔을 때 제가 좋아하는 책을 같이 읽을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하며 지어진 클럽명이에요.


Q. 대학생 때부터 판타지 소설을 쓰시고, 게임 프로듀서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구축하셨어요. 사실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이야말로 인생에 보탬이 안 되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는데요. 오히려 인생에 보탬이 안 되는 책으로 철학, 과학 분야의 책을 고르신 게 흥미로워요. 

이상균: 제가 읽는 책들의 주제가 평범하지 않거든요. 저는 어릴 때부터 굉장히 엉뚱한 질문을 많이 했어요. 커서 알았는데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나오는 질문을 어린 시절에 혼자 하고 그랬죠. 요즘 읽고 있는 책들도 ‘내가 존재하는가’에 관한 게 많아요. 이런 인생에 보탬이 안 되는 책들을 같이 읽고 토론할 사람을 찾기 어려워요.



이상균 클럽장이 선정한 '인생에 보탬이 안 되는' 책들



Q. 트레바리를 통해 인생에 보탬이 안 되는 책을 함께 읽을 동지들을 만나셨나요?

이상균: 저는 회식을 하든 친구들을 만나든 무조건 9시면 집에 가요. 9시를 넘길 정도로 재밌는 대화가 없어요. 그런데 클럽 첫 번개에서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셨어요. 20대 때 이후로 처음이었죠. 다음날 숙취가 있는 상태로 출근해서 자리에 앉았는데 일이고 뭐고 계속 어젯밤에 했던 얘기가 생각나는 거예요. 오전 내내 어제의 대화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죠. 같이 회의한 동료가 무슨 생각 하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문득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트레바리에 빠져서 ‘다음 모임은 언제지, 빨리 또 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하니까 이게 위험할 수도 있다 싶었죠. (웃음) 원래 자극이라는 게 반복되면 조금씩 약해지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닌데 첫 번개가 끝나고 나서 그 여파가 장난 아니었죠. 다른 인간관계가 다 시시해 보였으니까요.



인생에 보탬이 안 되는 이야기를 나누며 인생이 풍요로워졌어요


Q. 양자역학, 뇌과학, 심리철학 등 선뜻 집어 들기 어려운 책들을 함께 읽었어요. 클럽장으로서 멤버들이 그동안 잘 생각해 보지 않은 주제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을 이끌기 위해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이상균: 클럽을 시작하면서 제가 강의하는 형식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게임 개발에 관해 이야기하면 당연히 제가 강의를 하겠죠. 그런데 이건 제 전문 분야가 아니고, 관심 있는 분야지만 멤버들하고 아는 정도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이분들이 왜 시간과 돈을 써서 여기 올까 생각해봤어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첫 번째는 즐겁고 싶은 욕구이고, 두 번째는 뭔가 얻어가고 싶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우선 멤버들이 와서 즐거워야 한다는 것이 제 목표였어요. 그러기 위해 멤버들의 독후감이나 발언을 반박하거나, 틀린 걸 지적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죠. 제가 가진 배경지식을 활용해 멤버들의 생각이나 주장에 대해 ‘그 내용은 이거랑 비슷합니다’ 보충 설명을 해드리고 지지해주는 방향으로 진행했어요.

'내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심리철학 책을 읽고 김태우 님은 "내 의식이 부차적인 산물이라면, 이왕이면 좋은 부산물이 되고 싶다"라고 독후감을 쓰셨어요. 그걸 보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부분, "이러한 게 인생이라면, 좋다. 처음부터 한 번 더!" 가 딱 연상되더라고요. 그래서 “그 외침이 니체 같았다”고 하니 끝나고 그 책을 한번 읽어보겠다고 하셨어요. 긍정을 통해 서로의 세계를 확장해가는 경험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Q. 멤버들의 독후감을 살펴보면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런 것 같다’고 쓰신 경우가 종종 있어요. 대화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멤버들 각자 이해의 수준이나 이 모임에 대해 기대하는 바의 편차도 아주 컸을 것 같고요.

이상균: 멤버들이 삶을 살아온 배경과 생각이 다 다른데요. 변호사이신 이상미 님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직업 세계와 연결돼요. 만약 자유 의지가 없고 모든 게 결정돼 있다고 하면 사람한테 죄를 물을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형사 전문 변호사인 상미 님에게 자유 의지는 꼭 있어야 해요. 그러면 제가 ‘법철학적인 측면에서 자유 의지는 반드시 있다고 가정합니까’ 이런 식으로 추가적인 고민을 유도하죠. 이렇게 본인 전문 분야 관점에서 설명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고, 멤버들의 세계관에 맞추려 했어요.

토론하다 보면 책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느껴질 때도 있어요. 책장을 그냥 쓱쓱 넘기다 읽다 하신 것 같아요. 그런 경우에도 제대로 읽은 부분이 보이면 그에 대해 눈높이를 맞춰서 피드백해요. 현존재라는 철학 용어가 있는데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황우상 님은 “신 없이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인간”이란 표현을 쓰셨어요. 멤버 개인에게 맞춤형으로 진행하면서 이렇게 각기 다른 해석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즐거워요.



새벽까지 계속되는 [인생에 보탬은 안 되지만] 번개 현장



이런 대화 트레바리에서만 할 수 있어요


Q. 같이 토론한 철학적인 질문에 대해 생각하신 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의 이야기를 긍정해주는 것도 있지만, 넉 달 동안의 방향성도 있었을 것 같고요. 시즌을 거듭하며 상균 님만의 커리큘럼이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상균: 클럽에서 같이 읽은 양자역학, 심리철학, 뇌과학 이게 다 사실은 ‘내가 존재하는가’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첫 번째 책(『일어날 일은 일어난다』)은 자유 의지는 있는가? 결론은 없다. 두 번째 책(『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은 내 감정은 나로부터 기인했는가? 기인하지 않았다. 감정은 사회적인 시그널이다. 세 번째 책(『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은 나의 주인은 나인가? 구조주의 철학 관점에서 나의 주인은 사회다. 그리고 마지막 책(『이것은 인간입니까』)은 내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흐름이었어요.

재밌잖아요. 내가 지금 이렇게 있는데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안 믿기잖아요. 그래서 이 사실을 모두에게 얘기해 주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했어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것이 이번 시즌의 테마였죠.


Q. 멤버들도 다 같은 결론을 내렸나요?

이상균: 아니요. 그래서 더 재밌더라고요. (웃음)

김영훈 님은 “내가 이럴 줄 알았다”고 하셨고요. 이육헌 님은 “길을 잃었다”라는 표현을 쓰셨어요. 두 번째, 세 번째 책을 읽고 모임을 할수록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게 확실해지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걸 인정할 수도 없고 반박할 수도 없고 뭔가 길을 잃은 기분이라고요. 내가 알고 있었던 세상이 깨지는 경험을 하신 것 같고, 그런 경험을 함께 할 수 있는 게 정말 기뻤어요.

한편, 박세은 님은 "내게 의식이 없다고 해도, 내게 펼쳐지는 내적 풍경 속에 오롯이 갇히는 고독은 여전히 아름답다"는 말씀을 남기셨어요. “의식의 존재 유무와 인간다움이 관련이 있는가? 의식이 없다고 해도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 여전히 아름답다”라고요. 제가 끌고 가려는 방향으로 안 오신 건데, 오히려 제가 한 수 배웠습니다. 

이번 시즌은 제가 생각한 결론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다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요. 이끌어간다고 그렇게 되지도 않고, 오히려 더 재미있는 결론들이 나오는 것 같아서 억지로 하지 않을 거예요. 각각의 질문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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