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넘게 트레바리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클럽의 멤버와 파트너를 두루두루 경험하신 분의 이야기, 궁금하지 않으세요? 트레바리에서 알게 된 영화와 맛집, 그리고 사람들로 인스타그램이 채워지고 있어 이제는 트레바리가 취미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시는데요. 그러면서도 동시에 '어쩌면 시즌이 끝나고서는 못 볼 수도 있지만 언젠가 다시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사이'인 느슨하고 투명한 관계를 지향하시는 분입니다. '자타공인 트레바리 덕후'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트레바리 덕력을 갖추신 유림님을 만났습니다.
(인터뷰/촬영 - 최성운 님)
[덕덕], [셀셀], [더부스], [마음-옐로] 그리고 다음 시즌 [문-25] 파트너까지, 다양한 클럽들을 경험하셨다고 들었어요. 클럽을 고르시는 기준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저는 첫 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트레바리에서 처음 들어간 클럽이 [덕덕]이었는데, 당시 첫 책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 flow>였어요. 제가 심리학을 전공했는데, 대학 생활 동안 그 책을 빌려놓고 안 읽다가 다시 빌린 게 세 번쯤 됐거든요. (웃음) 또 호기심이 많은 편이어서,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영역이 궁금해서 클럽을 선택한 적도 있고요.
[덕덕] 클럽에는 어떤 분들이 오시는지 궁금해요.
우선 저는 스스로 좋아하는 분야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서,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뭘 덕질하는지 궁금해서 신청했었어요. [덕덕]에는 참 다양한 색깔의 분들이 계셨는데, 자기 색깔을 지키면서도 남과 어울릴 줄 아는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자기 취향이 확실한 것과 그걸 강요하지 않는 게 공존할 수 있다는 걸 배웠던 것 같아요.
지금 가장 애정을 쏟고 계신 취미는 무엇인가요?
저는 자타공인 트레바리 덕후에요. 이렇게 말하면 “아, 당신은 인정해.” 라는 말도 들어요. (웃음) 제 인스타그램을 봐도 트레바리에서 알게 된 영화, 트레바리에서 알게 된 맛집, 트레바리 멤버들 통해서 알게 된 사람, 이런 식이거든요. 아무래도 멤버 분들 중에는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채우는 데 관심 있는 분이 많다보니까, 가만히 있어도 좋은 정보가 여기저기서 오가더라고요. 제 취미 생활이 트레바리와 직간접적으로 많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커뮤니티로서의 트레바리를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원래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편이신가요?
기본적으로 좋아하기는 하는데, 사람과의 관계를 아주 편하게 생각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말할 때 단어도 골라서 쓰고, 다른 사람의 반응을 살피면서 배려하려고 하는 편이거든요. 저 때문에 누가 불편해하는 걸 싫어해요.
그만큼 유림님의 개인적 영역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시겠어요.
제 영역도 중요하지만, 막상 혼자만 있는 건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문장이 있는데, 정세랑 작가님이 소설 <피프티 피플>에 쓰신 말이에요. ‘세상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잡아매는 것은 무심히 스치는 사람들을 잇는 느슨하고 투명한 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욀 정도로 공감해요. 트레바리 멤버 분들 같은 경우에도, 어쩌면 시즌이 끝나고서는 못 볼 수도 있지만 언젠가 다시 마주치면 아주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사이거든요. 그 정도의 느슨함이 좋더라고요.
트레바리가 일종의 느슨하고 투명한 망인 셈이네요. 한 달에 한 번씩 느슨하게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공간.
네. 그리고 파트너를 하면서 멤버 분들 각각의 성향을 관찰하다 보면, 저처럼 트레바리 커뮤니티 내에서의 유대감을 중요시하는 분도 계시고, 그보다는 책을 읽고 클럽장님의 인사이트를 듣는 데서 더 큰 만족을 느끼는 분도 계세요.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서로의 차이에 서운해하지 않고 각자의 영역을 존중한다는 면에서도 느슨한 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1년 동안 파트너로 활동하셨던 [마음-옐로]에 대해 여쭤볼게요. 심리학을 전공하셨는데, 그러면 클럽의 방향성이 학문적인 쪽이었나요, 아니면 마음 건강과 관련된 쪽이었나요?
저는 학문적인 앎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상태에 대한 인식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 스스로 감정을 돌볼 줄 알게 된 것이었거든요. 예를 들어, 똑같이 ‘나 짜증나’라고 말하더라도 실제로는 서운했을 수도 있고, 화가 났을 수도 있고, 슬펐을 수도 있고, 미묘하게 다르거든요. 감정 표현을 세분화하는 법을 배웠던 게 제 인생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자기 인식이 되면 마음 건강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법이기도 하고요.
어떤 책을 읽었는지 하나 정도 소개해주시겠어요?
두 번째 시즌에 <사람은 누구나 다중인격>이라는 책을 읽었어요. ‘개인이 마주하게 되는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가질 수 있는데, 일관성이 없다고 나쁜 게 아니라 상황에 맞는 인격을 적절히 사용하는 건 좋은 일이다’는 메시지가 너무 좋았거든요. 회사에서의 저와 트레바리에서의 제가 심하게 다른 편이어서 ‘이래도 괜찮을까?’ 하고 고민했었는데, 책을 읽고 나서 여러 모습의 제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마음이 편해졌죠.
본인의 감정을 관찰하고 세분화하는 힘을 기르셨다고 했는데, 팁이 있나요?
감정어를 많이 아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아는 단어의 수에 따라서 인식의 범위가 결정이 된다고 하잖아요. 우선 감정어를 많이 익히고, 단어들의 미묘한 차이를 내 상황에 적용시켜보면서 가장 적절한 표현을 찾는 거죠. 서운한 것과 속상한 건 어떻게 다를까, 기쁨과 행복과 즐거움은 또 어떻게 다를까. 이런 식으로 경험을 하나씩 꺼내보면서 감정어를 가져다 대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네요.
[마음-옐로] 파트너로 활동하신 뒤에, 다른 클럽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아무래도 파트너를 하면 신경 쓸 일이 많다보니까 쉬고 싶기도 했고, 제가 멤버를 하다가 파트너를 했는데 다시 멤버로 돌아가면 어떤 느낌일지도 궁금했어요. 이제 무슨 클럽을 고를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문득 제가 그동안 읽고 싶은 책을 사뒀던 게 전부 소설이라는 걸 발견했어요. 그래서 [문] 클럽에 들어가기로 결심했고요.
소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때 인식하신 거예요?
네. 가장 소중한 친구가 소설을 무척 좋아하는데, 아직 제가 책에 흥미를 못 느끼던 시절에 같이 서점에 갔다가 친구에게 질문했던 기억이 나요. ‘사람들은 소설을 왜 읽는 걸까?’ 하고요. 2년 전에 그랬던 제가 지금은 문학 클럽 파트너가 됐으니, 재밌죠.
이제 스스로는 그 이유를 찾으셨나요?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에세이와 비교하면 덜 현실적이라서 좋은 것 같아요. 소설 속 인물들의 감정이나 사건은 어쨌든 가상의 것인 만큼 제 방식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실화가 아닌 데서 오는 편안함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종류의 소설을 좋아하세요?
요새는 한국 소설을 많이 읽어요. 모국어로 쓴 문장이나 단어라는 게, 쓰는 사람이 구사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인 거잖아요. 최근에는 최은영 작가님의 <내게 무해한 사람>과 구병모 작가님의 <아가미>를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인터뷰 전에 인생의 책을 한 권 가져와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어떤 책을 가져오셨나요?
<숨결이 바람될 때>. 앞길이 탄탄대로였던 젊은 의사 선생님이 말기암 선고를 받고 쓰신 에세이에요. 선고를 내리던 사람이 선고를 받은 거고, 그만큼 자괴감에 빠지기 더 쉬울 텐데도 남은 순간을 의연하게 살아가시더라고요. ‘살아내는’ 게 아니라, 끝까지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포인트가 너무 좋았어요.
얼마 전에 트레바리 북쉐어링이라고, 참가자들이 각자 책을 한 권씩 가져와서 소개한 뒤에 랜덤으로 나눠 받는 이벤트가 있었어요. 그때도 이 책을 가져갔는데, 받으실 분에게 남기는 쪽지에 이렇게 적었어요. ‘아무것도 잘하지 않아도 건강하게 살아낸 스스로에게 감사할 수 있었다.’ 이미 머리로는 익숙한 말이었지만, 나로서 건강하게 살아낸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는 걸 마음으로도 와 닿게 해준 책인 것 같아요. 아까 제가 소설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이 책은 오히려 에세이라서 의미가 있었어요.
유림님께서는 이미 삶의 태도를 단단하게 지니고 계신 것 같아요. 지금은 본인을 얼마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앞으로 유림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은 얼마나 더 남았을까요.
과거의 저보다는 많이 아는 것 같고, 저를 알아가는 과정은 평생 지속해야 할 것 같아요. 스스로를 직면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지만, 다행히 저는 그 과정을 즐기는 사람인 것 같고요. 그리고 한 가지 사물을 본다고 해도 저와 타인의 경험이 다른 만큼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을 텐데, 그 차이를 신기하고 재밌게 받아들이는 삶을 살고 싶어요.
아까 드리려다 놓친 질문인데, 가장 좋아하는 감정어가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따스함? 그러니까, 따뜻함보다는 어감이 좀 더 부드럽잖아요. 부담스럽지 않은 적당한 정도의 온기인 것 같아요. 안전한 무언가에 감싸여서 편안하게 잠들 법한 느낌이 좋고, 그래서 [마음-옐로]도 따스한 클럽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고요. 멤버 분들에게 들었던 피드백 중 가장 좋았던 것도 ‘여기서는 속마음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였어요.
이제 [문-25]도 그런 클럽으로 만들어 나가실 테고요. 혹시 이미 첫 책을 고르셨나요?
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으려고 해요. 삶에 대한 무한하고도 깊은 애정이 담긴 책이라고 해서 골라봤어요. 책을 읽으며 나의 삶에 대해 마음껏 생각해보고, 모임날에는 서로의 삶을 편안하게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오늘 나눈 이야기가 한 점으로 명확하게 모이는 느낌이네요. 감사합니다.
느슨하고 투명하게 관계 맺을 수 있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