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이 녹아있는 공간은 어떤 곳인가요?
당신의 삶이 녹아있는 공간은 어떤 곳인가요?
2019.07.18

<여름은 거기 오래 남아>는 삶과 맞닿은 건축을 꿈꾸는 사람들과 언제까지고 계속되었으면 했던 그 여름의 고아한 나날을 그린 책입니다. [북큐-퍼플]에서는 이 책을 <말하는 건축가>라는 다큐멘터리와 함께 보았습니다. [북큐-퍼플] 멤버들이 나눈 삶과 맞닿은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엿보러 가실까요?







'운 좋은 날들의 기억은' 오래 그곳에 남아 - 김보름님





정말 좋아하는 공간이 생기면 나는 설명하다말고 ‘여기는 꼭 가서 봐야해, 가봐야지만 알 수 있는 그런 공간이야’라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 체념하듯이 그리고 당부하듯이 상대방에게 입장을 전한다. 그냥 ‘좋다’라고만 얘기하기엔 나의 묘사 실력이 터무니 없는것에 갑갑함을 느끼고는 ‘가봐야 알아’라고 대체해버리지만 실제로 방문한 사람마다 그 공간이 동일한 정도의 좋은 경험을 내어주지는 않는다. 좋은 공간이 기억에 머무르게 하게 하는 것은 그 공간에 다다르게 하는 총체적인 '운 좋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창덕궁에 갔던 날도 그러했다. 갔던 날의 나의 기분, 날씨, 배고픔의 정도, 혼자갔는지 무리지어서 갔는지, 주변의 환경은 어떠했는지, 가는 여정은 길었는지, 입장권이 비쌌는지 아니면 너무나 자비롭게도 무료인지 등등, 내가 경험한 날은 사실 그 날에 맞춰진 운 좋은 날이었다. 


책에서 나온 오감외에 내 자신이 생각하는 또 다른 마지막 감각이 있다. 그 마지막 감각이 공간의 결을 좌지우지 한다고도 믿고있다. 아마 너무나 당연해서 아니면 수도없이 얘기해와서 식상할수 있지만 그 마지막 감각은 바로 사람이다. 좋은 공간이란 나에게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질문처럼 딱 한줄로 말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정답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어서 결국엔 얼버부리게 되는 알듯 모를듯 하여간 아직도 탐구중인 연구 대상이다.


건축물이 종종 사람과 같은 느낌을 전달하는데 젊고 패기 넘치는 근육질의 남성 같은 건물도 있고,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로운 할머니 같은 건물, 명량한 어린이 같은 건물, 아니면 정말로 우아하고 매혹적인 섹시한 사람같은 건물도 있다. 건축물에서도 사람에게서 받는 인상이 시간에 따라, 경험에 따라 바뀌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첫 인상이 오래가는 것 같다.


 왜 이 건축가일까? 혹은 왜 이런 건축물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뾰족한 답변은 아직 없다. 하지만 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고민하고 나의 손과 수많은 협력하는 손을 거쳐서 땅 위에 만들어낸 그 공간은 누구나 그 존재 자체만으로 받아들여지는 운 좋은 날들의, 따듯한 사람들의 공간이 되기를 바래본다.







도서관의 추억 - 이슬아 님

(이 글은 슬아 님이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고 영감을 받아 쓰신 단편 소설입니다.)




캠퍼스 커플은 절대 아니다. 라는 말을 인사처럼 듣던 4월과 5월 사이. 남자친구가 생겼다. 같은 과도 아니고 같은 인문사회대도 아니고 가까운 조형대도 아닌 머나먼 과니까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어떤 핑계도 갖다 붙일 수 있겠지만) 동기지만 삼수를 하고 들어온 오빠였는데 뼛속까지 문과생인 나와는 정반대인 남중, 남고, 공대의 순을 밟고 있는 친구라 모든 게 달랐다.건축공학과는 주로 정문에 가까운 대륙관에 수업이 있었고 문창과였던 나는 전공뿐만 아니라 모든 교양이 후문과 가까운 어의관이라 우리는 공강이 맞을 때면 학교 중앙에 있는 ‘붕어방’ 근처를 따라 산책했다. 연못 주변에 나무 펜스가 설치 되기 전이라, 붕어방이 얼마만큼 직관적으로 지은 이름인지 연못에 코를 박고 볼 수 있었는데, 어느새 붕어들이 몰려와 먹을 것을 주지 않는 사람이란 걸 깨닫고선 유유히 사라졌다.


여름이 가까워지면서 해는 길고 따가워졌다. 햇볕을 핑계 삼아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사이의 어색함을 숨기기 위해 도서관에 가는 것을 제안했다. 새 학교에서 제일 좋아하는 좋아하는 장소에 좋아하는 사람과 가면 좋지 않을까 들뜬 마음으로 물어봤고 조금 난감하단 얼굴을 하며 ‘그래 가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책을 읽으면 엄마가 용돈을 줘”

“그래? 오빠네 엄마가 우리 엄마면 좋겠다. 난 그럼 용돈 마를 날이 없을 텐데”


도서관에 가는 길에 서로의 독서 생활에 대해 말했다.

‘우린 책 읽으러 가는 게 아니고 영화 보러 가는 거니까 오늘 오빠 용돈은 없겠다.’ 하니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눈웃음이었다.‘

이 장면 때문이라도 도서관에 많이 올 거야’ 바닥에 떨어지는 볕을 가리키며 그에게 말했다.


신나서 조잘거리는 내 옆에서 걷던 그는 살며시 어깨를 감쌌다.

‘사람들 지나가니까’ 하고 조금 붉어진 얼굴로 앞을 보며 걸었다.


우리는 그 후로 중앙도서관 말고도 도서관 데이트를 자주 했다. 마침 서로 집도 멀지 않은 동네라 기말고사에는 구립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했다. 졸립다는 핑계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도서관 뒤 산책로를 걸었다. 비가 제법 세게 쏟아졌지만 우산은 하나였다. 산책로에 징검다리처럼 드문드문 놓인 돌을 한 발에 하나씩 같이 나눠 밟았다. 마지막 돌에선 두발을 마주보고 서서 기나긴 포옹을 했다. 반팔 밑 맨살에 체온이 닿자 쌀쌀해 돋아났던 닭살이 금방 잠잠해졌다. 향수 냄새를 뚫고 티셔츠에서 희미하게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빗줄기가 경쾌하게 우산을 튕겨 나갔다. 여름의 시작이었다.


도서관에 많이 올 거라는 내 말은 거짓말이 돼버렸다. 군대를 이유로 그는 떠나가 버렸다. 이별을 시발점으로 2학년이 되면서 뒤늦은 사춘기를 맞은 나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자체 휴강을 넘어선 자체 방학을 하는 정도였으니 당연히 도서관도 가지 않았다. 방황을 끝마치고 돌아온 3학년 돌아간 도서관 천장은 꼼꼼하게 불투명한 재질로 덮여있었다.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하고자 함이 이유였다. 그리곤 졸업할 때까지 열람실과 멀티미디어실 복도 쪽은 자연스럽게 가지 않게 되었다. 사방이 막혀있는 열람실은 내 공부습관과 맞지 않았고 시청각 자료를 보러 멀티미디어실을 가게 되는 일이 생기면 반대쪽 복도로 돌아갔다. 생각해보면 달라진 조도에 다른 곳이라고 기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시간이 흘러 그가 제대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었나 보다. 인문학 쪽 교양이나 어학 관련 교양을 하나도 듣지 않는지 운명적인 재회 같은 것은 없었다.


비와 우산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혼자 생각했다. 도서관 빛처럼 이 체온과 향기도 오래 남아있겠지.중앙도서관에 내리쬐던 볕 장면이 방이라면, 산책로에서 나눴던 포옹은 여행지 숙소였나보다. 글을 쓰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그것이 꼭 어둠 속 방을 헤쳐나가듯 어둠을 휘적이는 팔과 같아서 내 방은 오래된 습관과 행동으로 조금만 더듬으면 부딪히지 않고 나갈 수 있지만, 여행지 숙소는 이리저리 치이고 찧이며 나아가는 꼴이었으니.한동안 우산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괴로워했던가? 의심이 들 만큼 기억은 희미해졌다. 내린 비에 숙였던 우산을 들어 짙어진 여름을 본다.







어머니, 집은 재테크의 수단이 아니란 말이에요 - 송인근 님




아주 느리게 그리고 섬세하게 흘러가는 소설의 시간들이 부러웠다. 그들이 주고 받는 건축 이야기의 디테일함은 치열하기도 했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따뜻함에 책을 읽는 내내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담담하던 내 마음을 콕 찌르는 구절이 있었다.


'아마도. 비를 맞거나, 태양에 이글이글 타거나, 강한 바람을 맞으면 그것을 견뎌내는 것만도 벅찼지. 그러나 움막이라면 아주 잠시라도 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불을 멍하니 보는 여백 같은 시간이 있었을 거야. 인간에게 마음이 싹튼 것은 그런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집 안에 계속 있으면 점차 견딜수가 없어져서 밖에 나가고 싶고, 자연 속을 걷고 싶고, 나무와 꽃을 보고 싶고, 바다를 보고 싶다고 원하게 되지. 인간의 내면 같은 것은 나중에 생긴 것으로 아직 그다지 단단한 건축물은 아니라는 증거일 거야. 집 안에서만 계속 살 수 있을 만큼 인간의 내면은 튼튼하지 못해. 마음을 좌우하는 걸 자기 내부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찾고 싶다, 내맡기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무라이 선생님께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흠칫 놀랐다. 내 마음은 너무나 물렁물렁해서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고 물이 새고 벽이 갈라지기 일쑤다.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내 마음이 부실공사로 지어진 것은 집을 '사람이 먹고 자고 사는 공간' 이 아닌, '재테크의 수단' 으로 여긴 어머니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엄마 미안) 서울 강남에 살고 싶다는 어머니의 강한 집착을 원동력으로 강릉에서 올라와 거의 2년마다 전세를 전전했다. 그 덕에 나는 단 한번도 안정적인 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다.


집은 항상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었고, 정리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정서적으로 힘들때도 집 보다는 밖에서 친구들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근본적인 안정감 없이는 내 마음이 단단해질 수 없었고, 내 정서의 기본값은 '불안'이 되어버린 것 같다.


최근 독립하여 생애 처음으로 정식으로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좋으면서도 외롭다. 정리된 공간이 안정감을 주고, 내 물렁한 마음에 돌을 던지는 사람이 없어서 좋지만, 반대로 사람 냄새, 고양이 냄새가 나지 않아 외롭다. 미처 생각치 못했던 부분이다.


추신 : 파트너 님이 인스타에 이번 책과 다큐의 조합이 역대급이라며 북큐 사람들이 자기한테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감사합니다.








공간에 대한 추억은 멤버들마다 너무 달랐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 공간 자체보다 거기에 얽힌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거지요. 문득 [북큐-퍼플]의 모임방은 어떤 공간일지 궁금해집니다. 이런 책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북큐-퍼플] 신청이 시작되었어요. 아래의 '트레바리 독서모임 알아보기'를 누르시면 현재 모집 중인 클럽들을 볼 수 있답니다! 새로운 시즌에는 어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지지 않나요?

우리 이제 같이 이야기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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